
문화유산 만드는 김순기소목장을 아시나요?

광화문과 서울역 문짝 제작 현장
수원시 장안구 북수동 48번지, 경기도 무형문화재 14호 소목장 김순기 선생의 작업장인 창호공방엔 열기가 가득하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문짝을 마무리 하려는 손길이 분주하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사적 제 284호인 서울역 역사 보수 공사에 쓰일 문짝도 여러 개 보인다. 우리나라 중요한 건축 문화유산의 창호가 대부분 제작되는 현장이다.
1940년 안성에서 태어난 김순기 선생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수원에 온다. 한 목공소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목공일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넉넉지 않은 집안의 장남으로서 온갖 고생을 이겨내며 12년을 보내고 26세에 목공소를 차려서 독립을 한다. 지금의 북수동 성당 뒤 초가의 8평 남짓한 작업장이었다. 이때는 이미 군대도 다녀왔고 기술도 좋아서 인정을 받았던 때였다. 재료로 구입한 나무가 한 수레, 기본적인 연장 두 벌이 고작이었던 출발이다. 그래도 수원에서 이름을 날리던 소목장 이규선 선생에게 10년 동안 배운 기술이 든든한 뒷받침이었다.

목수는 깎아내기 때문에 못 산다?
주변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왜 하필이면 목수 일을 하느냐고 비아냥거리면서 목수는 늘 나무를 ‘깎아내기’ 때문에 못산다고 놀렸던 것이다. 미장이는 덧붙여서 잘 살고 대장장이는 그 딱딱한 쇠를 늘리기 때문에 부자가 된다고 했던 시기였다.
그래도 청년 김순기는 묵묵히 제 길만을 고집했다. 만들기 어려운 창문이나 까다로운 현장이 닥치면 밤을 새워서라도 머리를 쥐어짰고 다양한 방법으로 응용도 하여 극복해 내었다.
서른 살에는 결혼도 하고 딸 하나와 두 아들도 기르면서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오기와 아이들에게 만은 풍요로운 삶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결혼 첫날 부인과 다짐한 약속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개발의 바람을 타고 일감이 밀려들어 재미를 제법 보았는데 그만 87년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는 사고를 겪는다. 정조 임금의 사당인 화령전의 풍화당 문짝을 제작하다가 생긴 일이었다.
하필이면 오른손이어서 좌절하였고 다시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초, 중, 고에 다니는 아이들과 동생들 생각에 자꾸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연장을 다부지게 잡았다.
사찰과 문화재 창호에 쏟은 열정
김순기 선생이 신체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찰과 문화재의 창호에 쏟은 열정은 가히 놀랄 만한 일이다.
사찰은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화성행궁 복원 공사 때 모든 문짝을 제작하였고, 남한산성의 행궁 복원과 경복궁 복원 공사, 최규하 전 대통령과 조병옥 선생의 생가 복원에도 김순기 선생의 손길이 미쳤다.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 선생의 재실과 김연아 선수의 그 밴쿠버 동계올림픽 한국관에도 선생의 아름다운 창호가 대한민국의 대표 공예품으로 전시되었다.
1995년에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14호 소목장으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다. 이제 그의 손길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1999년 김순기 선생은 그동안 애써 모은 돈으로 지금의 창호공방을 건립한다. 1층은 작업장과 전시장으로 꾸미고 2층은 살림집으로 만들어 거주하면서 더 아름답고 좋은 창호 제작에 몰두한다.
꽃무늬 창살에 담은 꽃 같은 마음

작업장 옆 창호전시장에 들어서면 다양한 꽃무늬 창살이 반겨준다.
꽃처럼 아름다운 마음으로 만들어야만 제대로 된 꽃창살이 나오는 것 아닐까? 꽃무늬 창살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맛보게 해준다. 거친 육송을 다듬어 연속의 꽃무늬를 조각해낸 것은 신기(神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서로 끼워 맞추어 구조적인 안정을 확보하면서 무늬들이 조화를 이루게 하고, 빛의 투영성까지 계산해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을 그는 어떤 마음으로 했을까.
오래 된 절의 문짝에서 빛바랜 꽃창살을 바라보면 이제까지 느껴온 아름다움의 정의는 가치가 없어진다.
더구나 볕 좋은 날 법당 안에서 꽃창살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꽃무늬들은 그 향기로 인해 어질어질해질 것만 같다. 그러니 법당 가운데 앉아 있는 부처님의 눈은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부처님을 위한 불국토를 조성해 놓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만 공유해도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과 겸손한 생각이 아름다운 창살을 만들어냈다. 한 장인의 열정은 이렇듯 부처님과 모든 중생들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장인의 미래를 위하여

김순기 선생은 목수가 천직이라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목수가 될 것이며 역시 소목장으로서 창호 제작에 또 한 생을 바치겠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게 큰 문제라고도 한다. 기술만 배우면 평생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을 터인데 하면서 혀를 찬다.
꼭 경제적인 보답보다도 더 큰 희열은 어려운 문짝을 만들 때 온 정신을 집중하여 완성했을 때 느낀다고 한다. 나무에 연필로 금을 그으면 그 두께 때문에 정확하지 않아서 칼로 날카롭게 금을 그어 다듬고 조립하면 딱 들어맞는 기쁨을 장인이 아니면 그 누가 알랴!
김순기 선생의 소목장으로서의 꿈은 두 가지이다. 이제까지 모아온 각종의 연장들과 다양한 문짝을 전시하고 가르칠 소목장박물관 건립이 그 하나이고, 국가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아 국가가 인정하는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다.
그의 예리한 눈썰미와 반세기 넘은 경험이 후손들에게 기여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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